다카쓰카사 가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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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쓰카사 가즈코는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의 셋째 황녀로, 1929년 도쿄 황궁에서 태어났다. 결혼 전 칭호는 다카노미야였으며, 1950년 다카쓰카사 노부스케의 장남 다카쓰카사 도시미치와 결혼하여 황족이 평민과 결혼한 첫 사례가 되었다. 결혼 후 남편의 사망과 자택 피습 등의 불행을 겪었으며, 1974년부터 1988년까지 이세 신궁의 최고 여사제로 봉사했다. 1989년 심부전으로 사망했으며, 자녀가 없어 양자를 입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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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가즈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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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명 | 다카노미야 가즈코 내친왕 (효궁화자내친왕) |
출생일 | 1929년 9월 30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도쿄시 황거 |
사망일 | 1989년 5월 26일 (향년 59세) |
사망지 | 도쿄도 |
안장지 | 니손인,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
배우자 | 다카쓰카사 도시미치 (1950년 결혼, 1966년 사별) |
자녀 | 다카쓰카사 나오타케 (양자) |
친척 | 일본 황실 |
아버지 | 쇼와 천황 |
어머니 | 고준 황후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 |
신분 | |
작위 | 내친왕 → (강가) |
경칭 | 전하 → (강가) |
가계 | |
가문 | 다카쓰카사가 |
아버지 | 쇼와 천황 |
어머니 | 고준 황후 |
주요 경력 | |
직책 | 이세 신궁 제주 (1974년 ~ 1988년) |
기타 정보 | |
훈장 | 훈일등 보관장 |
2. 생애
다카쓰카사 가즈코는 도쿄 황궁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칭호는 다카노미야(孝宮)였다. 당시 관례에 따라 부모가 아닌 궁녀들이 마루노우치에 있는 별도의 궁궐에서 양육했다. 1948년 가쿠슈인 여자고등과를 졸업하고 햐쿠타케 사부로의 집에서 1년간 신부 수업을 받았다.[1]
1950년 5월 20일, 메이지 신궁의 신관인 다카쓰카사 노부스케의 장남 다카쓰카사 도시미치와 결혼했다.[1] 이 결혼은 황족과 평민의 첫 결혼으로 많은 화제를 모았다. 다카쓰카사 가문은 비록 평민이었지만, 이전에는 왕자 칭호를 가진 귀족 가문(''구게'')이었기에 황실과의 결혼에 있어 전통적인 가문으로 여겨졌다.[2] 다카쓰카사 노부스케는 테이메이 황후의 사촌이었고, 가즈코와 도시미치는 이종사촌 관계였다.[2]
1966년 1월 28일, 도시미치는 긴자의 한 나이트클럽 호스티스의 아파트에서 일산화 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고, 일본 언론은 이를 자살로 추측했다. 남편 사망 7개월 후, 가즈코는 자택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입원했다. 충격을 받은 쇼와 천황은 그녀를 아카사카 어용지 내부로 이주하도록 명령했고, 가즈코는 심부전으로 59세에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974년부터 1988년까지 이세 신궁의 최고 여사제(''사이슈'')로 봉사했으며, 고모할머니인 기타시라카와 후사코에게서 그 역할을 물려받았다.[3]
다카쓰카사 부부는 자녀가 없었지만, 오규-마쓰다이라 가문에서 鷹司尚武|다카쓰카사 나오타케일본어(1945년 출생)를 양자로 입양했다. 나오타케는 훗날 일본 텔레커뮤니케이션 시스템 공사(NEC 통신 시스템)의 사장이자 이세 신궁의 궁사장이 되었다.[3]
2. 1. 어린 시절
1929년 9월 30일 오전 6시 16분, 도쿄 황궁에서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6] 어린 시절 칭호는 다카노미야(孝宮)였다.[8] 10월 6일, "다카노미야 가즈코"로 명명되었다.[7][8]당시 관례에 따라 친부모가 아닌 도쿄 마루노우치에 지어진 별도의 궁궐에서 여러 궁녀들에 의해 양육되었다.[1] 학령기 이후에는 언니, 여동생과 함께 고죽료에서 생활하였다.
1948년 3월, 가쿠슈인 여자고등과를 졸업하고,[1] 전 시종장 햐쿠타케 사부로의 집에서 1년간 신부 수업을 받았다.[13] 신부 수업은 서민으로서의 생활 수업을 의미했고, 도덴을 이용하는 등, 스스로 하려고 노력했다.[14]
1946년부터는 E.G. 바이닝 부인에게 영어 회화를 배우고 미국 문화를 체험했다.[12]

2. 2. 결혼
1950년 5월 20일, 다카쓰카사 가즈코는 전 왕자이자 메이지 신궁의 신관인 다카쓰카사 노부스케의 장남 다카쓰카사 도시미치와 결혼했다.[1] 이 결혼은 황족이 평민과 결혼한 첫 사례로 큰 주목을 받았다. 다카쓰카사 가문은 비록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법적으로 평민이 되었지만, 이전에는 왕자라는 귀족 칭호를 가진 고대 궁정 귀족(''구게'') 가문 중 하나였으며, 황실과의 혼인에 있어 전통적인 가문으로 여겨졌다.[2] 다카쓰카사 노부스케는 테이메이 황후의 사촌이었고, 가즈코와 도시미치는 이종사촌 관계였다.[2]1949년 9월, 교토의 미야코 신문은 가즈코와 오타니 고쇼와의 결혼 기사를 보도했고,[16] 11월 23일 요미우리 신문은 약혼이 결정되었다고 보도했다.[17] 그러나 근친혼을 피하려는 천황의 의향으로 이 혼담은 무산되었다.[16]
같은 시기 다카쓰카사 노부스케의 장남 도시미치와의 혼담이 나왔다.[16] 고준 황후는 딸의 의사를 존중하여 맞선과 교제를 권했다.[19] 도시미치는 오미야 고쇼에서 가즈코와 만남을 거듭하며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20]
1950년 1월 2일 천황의 승낙을 얻고, 1월 20일 다카쓰카사 가문은 수락 의사를 밝혔다.[16] 1월 26일 정식 맞선을 거쳐 약혼이 내정 발표되었다.[16] 2월 1일 정식 재가가 이루어졌다.(당시 비공개)[21] 이는 전후 첫 내친왕의 강가였고, 상대가 전 공작가(公爵家)의 적자였지만 평민 샐러리맨이라는 점에서 화제가 되었다. 미국에서도 '천황의 황녀, 월급 20달러의 샐러리맨과 결혼'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22]
3월 3일 납채 의식을 거행하여 정식으로 약혼했다.[24] 약혼 중에도 도시미치가 가즈코의 거처를 자주 방문하는 등,[25] 자유로운 교제가 이루어졌고, 두 사람의 다정한 일화가 널리 알려졌다.[26] 언론 보도를 피하기 위해 가즈코는 정기적인 영어 수업을 핑계로 도시미치와 만남을 가졌다.[27] 바이닝 부인은 두 사람이 낭만적인 사랑에 빠졌다고 회고했다.[28]
가즈코는 소박한 혼수를 원했고, 아버지 천황도 이를 기뻐했다.[29] 약혼 중에는 다양한 파티가 열렸고,[30] 아키히토 친왕도 언니를 축복했다.[31] 가즈코의 결혼은 패전 후 재기한 풍요로운 생활의 이미지와 겹쳐져, 젊은 여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32][33]
그러나 궁내청과 다카쓰카사 부부는 소박함을 강조했다. 가즈코의 혼수품 중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눈에 띄는 위치에 놓여 있었고,[34] 도시미치는 호화로운 생활 보도에 대해 부정했다.[34] 가즈코의 일시금은 487만 엔이었는데, 이는 전사자 유족 1만 명분의 수당이라는 비판도 있었다.[35]
5월 20일 결혼하여 황적에서 벗어났다.[39] 당일 황거 앞 광장에 2000명이 모였고, 다카나와의 고린카쿠(구 다카마쓰노미야 저택)까지 인파가 이어졌다.[15] 신부 의상은 데이메이 황후가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혼례 때 맞춘 것이었다.[40] 혼례에는 황태후, 천황, 황후도 참석했지만, 다음 날 메이지 기념관에서 열린 피로연에는 불참했다.[41] 이는 황실 전범 제정 이후 천황의 황녀 및 내친왕이 황족 외의 사람과 결혼한 첫 사례였다. 가즈코의 강가는 요미우리 신문 선정 연간 뉴스 10위에 올랐다.[16]
1966년 1월 28일, 도시미치는 일산화 탄소 중독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추측이 있었다.[2]
2. 3. 결혼 이후
1950년 5월 20일, 전 왕자이자 메이지 신궁의 신관(신토)인 다카쓰카사 노부스케의 장남 다카쓰카사 도시미치와 결혼했다.[1] 이 결혼은 황족과 평민의 첫 결혼으로 많은 화제를 모았다. 다카쓰카사 가문은 메이지 유신 이전 ''화족'' 작위에서 왕자라는 귀족 칭호를 가진 고대 궁정 귀족(''쿠게'')의 일부였기에 황실 결혼에 적합한 가문으로 여겨졌다.[2]1966년 1월 28일, 다카쓰카사 도시미치는 긴자의 나이트클럽 호스티스인 마에다 미치코의 아파트에서 일산화 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는데, 일본 언론은 이를 두고 자살로 추측했다. 남편이 사망하고 7개월 뒤인 1966년 8월 22일, 칼을 든 침입자가 한밤중에 다카쓰카사 가즈코의 집에 침입하여 그녀를 공격, 오른쪽과 왼손에 부상을 입혔고 일주일 동안 입원했다. 충격을 받은 쇼와 천황은 그녀가 아카사카 어용지 내부로 이주하도록 명령했고, 심부전으로 5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974년부터 1988년까지 이세 신궁의 최고 여사제(''사이슈'')로 봉사했으며, 고모할머니인 기타시라카와 후사코로부터 그 역할을 물려받았다.[3]
다카쓰카사 부부는 자녀가 없었지만 오규-마쓰다이라 가문에서 鷹司尚武|다카쓰카사 나오타케일본어(1945년 출생)를 양자로 입양했는데, 그는 훗날 일본 텔레커뮤니케이션 시스템 공사(NEC 통신 시스템)의 사장이자 이세 진구 신궁의 궁사장이 되었다.[3]
3. 결혼 생활과 사회적 영향
1949년 9월, 교토의 지방지 미야코 신문은 가즈코 내친왕과 종형제인 오타니 고쇼와의 결혼 기사를 보도했고[16], 11월 23일 요미우리 신문은 약혼이 결정되었으며 오타니 가문도 긍정적인 의향을 표명하고 있다고 보도했다.[17] 그러나 천황은 근친혼을 피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이 혼담은 흐지부지되었다.[16]
같은 시기, 메이지 신궁 구지인 다카쓰카사 노부스케의 장남 히라미치와의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16] 고준 황후는 딸의 마음을 헤아려 맞선이나 교제를 권했다.[19] 다카쓰카사 노부스케와 황태후가 사촌지간이었기 때문에 히라미치는 황태후의 거처인 오미야 고쇼에서 가즈코 내친왕과 면회를 거듭하며 서로 호감을 갖게 되었다.[20]
1950년 1월 2일 히라미치와의 결혼에 대해 쇼와 천황의 승낙을 얻었고, 1월 20일 다카쓰카사 가문은 다지마 미치하루 궁내청 장관에게 수락 의사를 전달했다. 1월 26일 궁내청 장관 관저에서 가즈코 내친왕과 히라미치의 정식 맞선을 거쳐 약혼이 내정되었다.[16] 전후 첫 내친왕의 하가(降嫁)이자, 상대가 전 공작가의 적자였지만 현재는 평민 샐러리맨이라는 점이 화제가 되었다.
3월 3일 납채 의식이 거행되어 정식으로 약혼했다.[24] 약혼 기간 동안 히라미치는 고미야가 자매와 함께 사는 구레타케 료를 자주 방문했고,[25] 언니 히가시쿠니 시게코보다 훨씬 자유로운 교제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크게 보도되었다.
언론 보도를 피하기 위해 가즈코 내친왕은 바이닝 부인 댁에서 영어 수업을 받는 기회에 히라미치와 만남을 가졌다.[27]
가즈코 내친왕은 시집갈 때 가져가는 그릇도 언니 히가시쿠니 시게코보다 훨씬 소박하고 적게 준비했으며, 그만큼의 금액을 히라미치와 함께 즐길 레코드나 라디오 구입에 사용하려 했고, 아버지 천황도 딸의 검소함을 기뻐했다.[29]
이들의 연애 결혼은 당시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고, 패전 후 재기한 풍요로운 생활의 이미지를 가즈코 내친왕에게 투영했다.[32] 가즈코 내친왕은 젊은 여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33]
그러나 궁내청과 다카쓰카사 부부는 소박함을 강조하려 했다. 가즈코 내친왕의 일시금은 487만 엔이었는데, 이는 전사자 유족 1만 명분의 수당이라는 비판도 있었다.[35] 궁내청은 황실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서민", "평민" 이미지를 통제하려 했다.[37]
5월 20일 결혼하여 황적에서 벗어났다.[39] 당일 황거 앞 광장에 2000명이 모였고, 미나토구 다카나와의 고린카쿠 (구 다카마쓰노미야 저택)까지 인파가 끊이지 않았다.[15]
신부 의상은 언니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혼례 때 데이메이 황후가 맞춘 것이었다.[40] 고린카쿠에서 열린 혼례에는 할머니 황태후, 아버지 천황, 어머니 황후도 참석했지만, 다음 날 메이지 기념관에서 다카쓰카사 가문 측이 연 피로연에는 불참했다.[41] 황실 전범 제정 이후, 천황의 황녀 및 내친왕이 황족 이외의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즈코 내친왕의 하가는 요미우리 신문 선정 연간 뉴스 10위에 올랐다.[16]
3. 1. 사후
다카쓰카사 부부는 생물학적 자녀는 없었지만, 오규-마쓰다이라 가문에서 양자인 나오타케를 입양했다.[3] 나오타케는 일본전기통신시스템 사장을 역임했고, 이세 진구 신궁의 대궁사를 지냈다.[3]4. 가계도
다이쇼 천황
메이지 천황
야나기하라 나루코
테이메이 황후
구조 미치타카
노마 이쿠코
고준 황후
구니요시 왕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구니노미야)
이즈미 마키코
시즈코
시마즈 타다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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